순돌이 1
2009. 11. 21. 12:09
김 · 민 · 기
1 … 친구
2 … 아침이슬
3 … 가을편지
4 … 아름다운 사람
5 … 작은연못
6 … 상록수
7 … 늙은 군인의 노래
8 … 내 나라 내 겨레
9 … 봉우리
10 … 잘가오
11 … 아하 누가 그렇게
12 … 파도
………………………………………
김민기는 1969년 경기중,경기고를 거쳐 서울대 미대에 진학했다.
중고교시절 내내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렸던 그는 미대에 진학하자마자
더욱 그림에 몰입했다.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 하며 그림물감값을 조달
하던 그에게 고교시절 친구가 찾아와 노래를 함께 하자는 제안을 했다.
고교시절에 이미 소문난 기타연주자였던 그는 그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여
다방에서 함께 노래를 불렀다.그러다 보니 제대로 학점을 이수하지 못해
낙제를 했다.
그 무렵 어느날 고교 동창생인 임문일이 서강대에 다닌다는 한 앳된 단발
머리 여학생을 그에게 소개했다.김민기와 양희은의 역사적인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그때부터 김민기는 집안사정으로 노래를 불러 돈을
벌어야 했던 양희은의 노래 반주를 맡았고,그녀를 위해 본격적인 작곡을
했다.양희은의 가수 데뷔곡인 「아침이슬」도 그때 태어난 노래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아침이슬」은 1975년 공윤에 의해 금지곡이 되어 방송을
통해서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다른 금지곡들은 분명한 금지사유가 명시
되었지만 「아침이슬」에는 아무런 금지사유가 명시되지 않았다 .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금지될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금지된 노래.
정부의 공식적인 금지에도 불구하고 70년대를 거쳐 80 년대에 이 노래
만큼 널리 불려지고 사랑받은 노래도 없다.수만의 군중의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아침이슬」은 무서운 감동과 전율을 동반하는 장엄한 레퀴엠
같았다.
1971년은 김민기에게 의미심장한 해였다.
그해 김민기는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독집음반을 출반했고 반체제 저항
시인인 김지하를 만났다.레코드 출반은 통기타 가수들의 성지였던 YMCA
청개구리홀의 후원자인 경음악평론가 최경식씨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레코드는 발매된지 얼마 되지 않아 압수조치를 당했다.
1972년 봄 서울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대되어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
에서 그는 동대문서로 연행됐고 시중에 유통 중이던 그의 레코드는 전량 수거
압수되었던 것이다.김민기의 이름으로 출반된 이 독집음반은 지금은 매니아
들 사이에 수십만원에 거래되는 희귀본이다.
그는 몇차례 공연과 관련하여 기관에 연행,조사,석방 등을 되풀이하다가
전북 익산으로 낙향하여 어느 집에서 머슴살이를 한다.그를 고용했던 주인
집은 정기적으로 경찰에 그의 동태를 보고해야만 했다.
80년대 초반 해태양식장과 탄광노동으로 번 돈을 영농자금 삼아 그는 김제
와 전곡에서 농사를 지었다.쌀농사를 짓고,마을청년들로 청년회를 조직해
쌀 출하사업도 벌였다.
1983년 겨울 전곡의 집에 화재가 나 가재도구와 책들이 몽땅 소실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시골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미국유학
에서 돌아온 김석만, 오종우 등과 함께 사무실을 낸다.아동용 뮤지컬 공연을
준비하고 음반출반을 기획했지만 내용과 상관없이 김민기라는 「불온한 이름」
때문에 공윤심의를 위한 접수조차 거부되었다.또 다시 좌절이었다.
1985년 8월31일,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그의 결혼식이 열렸다 .
김민기는 이미 서른다섯의 노총각이었다.그의 결혼식이 열렸던 서울미술관
에는 수많은 하객들이 모여 그의 결혼을 축하하였다.
결혼 이후 그는 70년대의 「신화적 인물」이라는 배역을 거부하고 조용한
「생활인」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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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김 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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